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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10년] 금융 - 기업, 잃은 것 과 얻은 것

사실련 0 662 2020.03.04 05:47
선진 금융기법들 도입은커녕 주도권만 넘겨줘

기업들 과감한 구조조정?? 지배구조 개선 성과

노동-공공부문은 진전 없어?? “개혁 시급” 지적

《국내 은행 가운데 한때 잘나갔던 제일은행은 외환위기 전후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부실화돼 1999년 말 뉴브리지캐피털펀드에 팔렸다. 당시 정부는 제일은행 매각이 국가신용등급을 올리고 선진 금융기법을 도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펀드의 속성상 단기 이익에 치중해 은행산업 발전이라는 장기 과제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뉴브리지캐피털이 막대한 이익을 챙기면서 제일은행을 영국계 스탠더드차터드은행에 팔아넘긴 직후인 2005년 1월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당초 기대했던 선진 금융기법 도입 효과는 전혀 얻지 못했다. 뉴브리지캐피털에 제일은행을 매각한 것을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한국 경제를 강타하자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등 4대 부문의 개혁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기업들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국민의 고통 분담 덕택에 한국은 2001년 8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일은행 매각 사례에서 보듯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이 같은 시행착오는 외환위기의 후유증으로 남아 아직까지도 국민 경제의 큰 짐이 되고 있다.

○ BIS비율 8% 아직 논란

외환위기 직후 금융시장이 누적된 부실과 신용경색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김대중 정부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명분은 ‘효율적 금융시스템 구축’이었다.

구조조정의 결과 국내 금융회사는 1997년 말 2103개에서 올해 6월 1304개로 줄었다. 10년 동안 금융회사의 3분의 1이 사라진 셈이다.

은행의 구조조정은 다른 금융권에 비해 훨씬 혹독했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8%에 미달하는 은행은 강제 퇴출되거나 합병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일반은행의 BIS 자기자본비율은 1997년 7.04%에서 지난해 12.31%로 크게 개선됐고 부실채권 비율이 6.70%에서 0.84%로 대폭 낮아지는 등 건전성도 향상됐다.

하지만 유동성 위기가 심각했던 시기에 BIS 자기자본비율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한 것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한 민간 경제연구소의 연구원은 “은행의 성장 가능성이나 유동성 비율 등 여러 가지 판단 기준이 있었을 텐데 BIS 자기자본비율이 구조조정의 유일무이한 잣대가 된 것은 지금도 아쉽고 의문스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스탠더드 열풍에 휘말려 국내 은행산업의 주도권을 외국 자본에 넘겨준 것도 대표적인 시행착오 중 하나다.

제일은행 외에 칼라일펀드로 넘어갔던 한미은행(이후 씨티그룹으로 흡수), 론스타펀드에 넘겨준 외환은행 등의 사례는 ‘국부(國富) 유출’ 논란까지 불러일으켰다.

○ 기업지배구조는 개선, 역동성은 상실

대기업의 방만한 차입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 경영은 한국을 외환위기에 빠뜨린 큰 원인으로 꼽힌다.

정부는 이에 따라 1998년 초 대기업들을 향해 ‘선단(船團)식 경영의 종식’을 주문하고 나섰다. 대기업들의 중복 또는 유사 사업을 주고받는 식으로 통폐합했던 ‘빅딜’이 이뤄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듬해에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분리 △순환출자 및 부당 내부거래 억제 △변칙상속 차단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했다.

기업들은 부실 자산과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주력 사업을 키우는 등의 자구 노력으로 수익성과 건전성 측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또 순환출자에 비해 지배구조가 비교적 단순한 지주회사로 전환한 기업이 올해 8월 말 현재 40개에 이르는 등 지배구조도 상당히 개선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식의 정책 혼선도 적지 않았다.

1999년 말 기업 구조조정을 촉진한다는 이유로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했다가 2001년 4월 ‘경제력 집중을 억제해야 한다’는 이유로 부활시킨 게 대표적이다. 정부는 지배구조를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이 제도를 고수하고 있지만 기업의 사업 다각화와 투자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외자 유치’를 지나치게 강조한 이후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05년 말 현재 1조 원 이상 매출을 올리는 외국계 기업 20개 가운데 13개(65%)는 당초 국내 자본이었다가 외환위기 이후 해외에 팔린 기업이다.

○ 끝나지 않은 구조조정

정부가 1997년 11월부터 올해 9월까지 투입한 공적자금은 168조4000억 원에 이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회수된 자금은 89조1000억 원(52.9%)에 그칠 정도로 외환위기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깊고 넓다.

특히 당초 정부가 내세웠던 4대 부문 개혁 가운데 금융과 기업을 제외한 노동 및 공공 부문은 변변한 실적이 없어 ‘개혁이 아닌 퇴보’라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허찬국 경제연구본부장은 “공공과 노동 부문의 개혁은 실질적 진전을 찾아보기 어려운 데다 일부에서는 과거 회귀적 모습까지 보인다”며 “외환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 부문에 대한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경제연구소 황인성 수석연구원도 14일 내놓은 ‘외환위기 10년의 평가와 과제’ 보고서에서 “노동 부문은 유연성이 외환위기 이전에 비해 크게 개선되지 못했으며 일자리 창출 부진 등 노동시장의 활력도 저하됐다”며 “합리적인 노사관계를 정립하는 동시에 노동 부문의 유연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가총액 30대 기업중 13개만 그대로 남아▼

단기업적 치중-대규모사업 기피 등

사라진 기업가 정신 빨리 되살려야

1990년대 중후반까지 확장 일변도로 질주하던 대기업들은 외환위기로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가 무너지면서 혹독한 구조조정에 내몰렸다.

많은 기업이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쓸쓸히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외환위기라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기업 중 상당수는 부실 자산과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새로운 수익원 발굴에 성공해 우량 기업으로 거듭났다.

동아일보가 14일 한국증권선물거래소 자료를 분석한 결과 1997년 6월 말 시가총액 상위 30위 안에 속했던 기업 가운데 올해 6월 말에도 30위 안에 든 기업은 13개(43.3%)에 불과했다.

당시 대우그룹의 핵심 계열사들은 그룹의 부도로 채권단 관리에 들어가는 수모를 겪었다. 또 기아자동차(17위)와 동아건설(30위)은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한때 부도 처리됐고, 현대전자(6위)와 LG반도체(7위)는 정부의 ‘빅딜 정책’에 따라 인위적으로 합쳐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기적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기업도 적지 않다.

올해 6월 말 현재 시가총액 30위 안에 드는 현대중공업(5위), 삼성중공업(17위), 대우조선해양(18위), 두산중공업(22위) 등 조선업체와 빅딜로 출범한 하이닉스반도체(11위), LG필립스LCD(12위) 등 전자업체는 세계적인 경쟁력으로 ‘수출 한국’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상당수 기업의 경영진은 주주를 의식해 단기 업적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대규모 사업은 꺼리는 ‘보수적 경영’으로 돌아섰다. 기업가 정신의 후퇴로 성장 잠재력이 약화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기업의 설비투자는 1990∼1997년 연평균 7.8% 늘었지만 2000∼2005년엔 연평균 1.15% 증가하는 데 그쳤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에서 탈출해 경제 회복의 속도를 높이고 중국도 무섭게 성장하는 틈새에서 한국 경제가 살아남으려면 기업들이 ‘기업가 정신’을 되살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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