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가출예방운동특위

제4회 청소년 가출예방관련 체험수기 수상작(금상)

관리자 0 218 2020.03.06 18:41
내 마음 속의 아버지

                                                                                                                           최   취   희
                                                                                                             서울 경서중학교 교사

  아버지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장례식장에서 보내온 차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가져온 들것의 한 귀퉁이를 잡겠다고 나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물건처럼 들것으로 옮겨지는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 내가 뭐래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8남매의 아버지, 그리고 유난히 사회적인 활동을 많이 했던, 그래서 맡은 직함이 열 손가락을 여러 번 헤아려야 했던, 그래선지 뭔지 모를 무게를 느끼게 하던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포함한 네 사람에 의해 너무나 가뿐하게 옮겨졌다.
작은 소도시의,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3일 밤낮을 지내신 아버지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아흔 한 해의 삶을 마감하셨다.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은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슬픔보다는 상황이 종료됐다는 허탈감을 몰고 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랬다. 무작정 내가 집을 나온 후 28년 동안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항상 감돌고 있었다.

  19세가 되던 해 4월. 나는 집을 나왔다. 그 해 나는 대입 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공무원 시험을 쳤다. 전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던 상황이 벌어졌고 나는 그런 상황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돌변하신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40대 중반에 본 늦둥이였던 나를 아버지는 유난히 예뻐하셨다. 1960년 충청도의 시골에서 태어난 난 초등학교 시절 항상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를 입었으며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가방을 메고 운동화를 신었다. 우리 집 조그만 사랑방은 3면이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한 멋진 서재였다. 소년 잡지가 학교를 통해 내 앞으로 배달되었다. 운동회가 열리거나 입학식, 졸업식 때 항상 아버지는 학부모를 대표하여 축사를 하셨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었고 난 아버지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동급생들보다 한 살이 어림에도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고 잘 해냈다. 이러한 생활은 중학교까지 이어졌다. 난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 집과 가까운 고등학교에 진학하길 원했으나 아버지는 공주에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대전에도 좋은 학교가 있었으나 아버지는 부산스러운 도시보다는 차분하고 조용한 교육도시가 공부하기에는 제격이라고 하시면서 한나절이나 걸려 손수 원서를 사가지고 오셨다. 당시는 고등학교도 입시가 있었는데 특히 그 학교는 사범대부속고등학교로 사범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전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와 입학 점수 커트라인이 높았다. 난 집을 떠나는 것도 싫었지만 혹시나 떨어질까 봐 두려워 가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내 의사와 상관없이 아버지가 원서를 접수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시험을 보고 입학하게 되었다.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눈물로 얼룩지면서 시작되었다. 당시만 해도 교통이 좋지 않아 집에서 공주까지 가려면 버스를 5시간 정도 타야 했다. 시골에서 차를 많이 타보지 않아 난 차멀미로 고생을 했고 무엇보다도 가족과 헤어지는 것이 힘들었다. 차멀미가 심해 집에 자주 다니지 못했지만 어쩌다 집에 왔다 돌아갈 때면 아버지가 버스터미널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짐을 실어주시고 아버지는 바빠서 가겠다고 하셨지만 한 번도 그냥 돌아가신 적이 없었다. 멀미날 때 먹으라고 오징어를 사가지고 오셨다 가시고, 사탕도 사오시고 여러 번을 들락거리곤 하셨다. 버스에 내 또래의 아이들이 많아 창피해 그만 가시라고 하면 얼른 내려 가셨다.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으셔서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다가 버스가 떠날 때 밖을 보면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계시다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계시곤 했다. 난 그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파 울며 울며 공주에 도착하곤 했다.
  1학년 때는 고전을 했다. 집을 처음 떠나서인지 가족을 말할 것도 없고 집 뜰에 있는 풀까지 보고 싶을 정도로 집이 그리웠다. 일기장은 날마다 눈물로 얼룩졌고 같은 방을 쓰던 선배는 나를 달래다가 같이 울곤 했다. 거기다가 성적은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았다.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에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데다가 전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다 보니 경쟁이 치열했고 무엇보다도 시험 문제가 아주 어려웠다. 첫 번째 시험에서 두 자리 수의 석차를 받아들고 나는 좌절했고 그 날부터 집 가까운 학교로 전학시켜 달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졸라댔다. 나를 배웅할 때마다 보여주던 아버지의 애절한 모습을 생각하며 전학을 허락해 주실 거라 생각했지만 아버진 단호했다. 이겨내서 내 자리를 찾아야만 앞으로도 자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마음 약한 어머니와 언니들이 내 편을 들어주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변하지 않으셨다. 결국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곧 나는 중학교때만큼은 아니지만 성적을 회복했고 혼자 지내면서 독립적으로 생활하게 되었고 강해졌다. 이때까지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행복 모드 그 자체였다. 그러나 대학진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나의 갈등은 시작되었다.
  아버지에겐 8남매 중에 하나는 사법고시를 패스시켜야 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큰 오빠가 그 꿈을 이루어주길 바라셨으나 결국 실패했고 남은 것은 늦게 본 막둥이, 바로 나였다. 그러나 난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예비고사 성적은 학교에서 보던 모의고사 점수에 훨씬 못 미쳤고 여기서 자신감을 잃어서인지 본고사도 엉망으로 치러 결국 아버지가 원하던 대학, 학과에 합격하질 못했다. 난 당연히 아버지가 재수를 시켜주실 거라 믿고 후기 대학 시험에는 응시도 하지 않은 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에게 학원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3월이 되면서 재수 이야기가 언제 나오려나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9급 국가공무원 시험모집 요강이 실린 신문을 던져주시면서 준비하라고 하셨다. 대학교 떨어지고 내 자신의 실력에 대해 궁금하던 차에 실력을 테스트할 겸 별 생각 없이 서울에 올라와 시험을 치뤘다. 시험은 아주 쉬웠으나 합격여부는 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3월이 다 지나고 4월인데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먼저 재수이야기를 꺼냈더니 아버지는 냉정하게 재수는 무슨 재수냐고 하면서 곧 공무원 시험 결과가 나올테니 붙으면 공무원이나 하라고 하셨다. 내 미래에 대학이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아버지의 나에 대한 기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으로 하여 그 날 밤 나는 조용히 짐을 쌌다. 그리고 용감하게 서울행 새벽 열차에 몸을 실었다. 어떻게 될지 몰라 알아두었던 이종 사촌의 전화번호만을 의지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상고를 나와 구로공단에 취직한 이종사촌 언니는 그 당시 벌집으로 유명했던 가리봉동에서 방을 얻어 자취하고 있었다. 고생 한 번 안해 본 네가 견뎌 낼 수 있겠느냐고 언니가 걱정했지만 나는 아버지에 대한 오기로 모든 것을 견뎌 내기 위해 노력했다. 부엌을 거쳐 들어가게 되어 있는 방, 불편한 화장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연탄 가스, 이종 사촌과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짜증스러움 등이 나를 힘들게 했지만 힘들수록 아버지에게 복수한다는 기분으로 때론 그 상황을 즐기기도 했다. 이종사촌이 집에 연락했는지 어머니가 용돈과 반찬을 아버지 몰래 보내 주었고 옆집 아주머니의 주선으로 중학생들 영어, 수학 과외를 하면서 서서히 나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언니가 발령통지서를 가지고 날 찾아왔다. 3월에 본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곧 발령통지서가 나왔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찢어버리셨고 두 번째 나온 발령통지서라고 했다. 이번에도 발령지에 가지 않으면 합격이 취소된다고 하면서 언니가 보기에 아버지가 절대로 재수시켜 주실 것 같지 않으니 직장을 다니면서 재수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아버지 도움 없이 당당하게 대학에 입학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언니 말대로 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의 공무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공무원 시험에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금방 발령이 났고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 것을 출근 첫날 알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엄청나게 공부한 것이 엉뚱한데서 실력을 발휘하게 된 셈이었다. 나이가 젤 어린데다가 마침 과장님의 따님이 나와 같은 나이라서 나를 딸처럼 대해주셔서 직장 생활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월급도 신기했고 어른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것도 즐거웠다. 퇴근해서는 시간이 많아 고등학교 학생들 그룹과외를 두 팀쯤 했다. 그러다 보니 돈이 모아져 환경이 좀 나은 곳에 방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나 혼자 지내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한 어머니가 언니를 올려 보내서 언니와 같이 1년을 꿈같이 지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지낸 자유로운 1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친하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친구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빨리 취업하려고 서울교대에 진학한 친구였다. 거의 1년 만에 만난 친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옷깃에 대학 배지를 달고 가슴에 책을 두어 권 안고 있는 모습이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학교 다닐 때 그 친구는 유복하게 자란 나를 항상 부러워했었다. 그런데 그 날은 내가 훨씬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친구를 보면서 난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 날 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퇴근 후에 과외를 하는 대신 학원에 다니기로 하였다. 공부만 집중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고등학교 때 스파르타식으로 공부를 해서인지 별로 어려움은 없었고 그 해 학력고사에서 오히려 고등학교 3학년 때 보다 더 높은 점수를 얻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학교를 낮추어서 지원했고 합격한 후 오랜만에 집에 돌아갔다. 집을 나온 지 거의 2년만이었다. 그 때 아버진 나에게 한 번 더 상처를 주셨다. 아버진 이름도 들어보지도 못한 대학이라고 하시면서 그 대학 나오는 것보다 공무원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 온 막내둥이에게 요것조것 맛있는 걸 해먹이려는 마음으로 들떠 있던 어머니의 눈물바람을 뒤로하고 아버지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다시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대학 4년 동안은 장학금과의 전쟁이었다. 학점에 울고 웃는 삭막한 4년이었고 대학 생활의 낭만은 나에겐 사치였다. 여전히 아버진 나에게 냉담하셨으나 어쩌다 한 번씩 올라오셔서 우리가 지내는 형편을 살펴보시곤 했다. 언젠가 등록금 액수보다 더 많은 장학금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교통비나 하라면서 주셨던 5천원이 내가 대학 4년 동안 유일하게 받은 용돈이었다. 나는 등록금을 내고 남은 돈을 부모님 용돈이나 하시라고 보내면서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왜 나와 아버지가 이렇게 지내게 되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에 남으려고 하였으나 2년 동안 더 이상 궁상을 떨기 싫어 방향을 급선회하여 중등학교 교사 순위고사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준비기간은 짧았지만 운이 좋아 시험에 합격하였다. 지도교수님께는 2년쯤 후에 돌아가겠다고 약속을 드렸는데 올해로 23년째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아버지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공직 생활을 끝내셨고 사회활동을 절반으로 접으셨고 아내를 잃으셨다. 그 많던 전답을 오빠 사업자금으로 날리시고는 붓글씨를 쓰시면서 마음을 다스리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칼날도 점점 무디어져 가고 있었으나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으로 마음 속의 앙금은 사라지진 않았다. 좋은 음식과 옷을 사드리면서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보약을 해드리면서도 아버지가 나를 위해 해 주신 것이 무엇이던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받아들이시는 아버지도 마음이 편하진 않으셨던 듯하다. 주는 사람 마음이 그 모양이니 받으시면서도 불편하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년은 그렇게 쓸쓸하고 초라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 집을 정리하게 되었다. 나는 서재를 청소하기로 했다. 청소를 하다가 책상 밑에 출석부만한 크기의 금전출납부가 20여 권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70년대부터 시작하여 90년대까지의 금전 출납과 간단한 일기 형식의 글이 아버지의 단정한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송아지를 낳았다거나 이웃집에서 빌려 온 것들을 적어 놓은 일상적인 내용들도 있었으나 그 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나였다. 중학교 생활 소소한 것에서부터 타지로 고등학교에 보낸 것에 대한 후회와 딸에 대한 그리움, 대학 시험에 낙방한 딸에 대한 안쓰러움, 집 나간 딸에 대한 염려와 신뢰, 대학과 순위고사 합격에 대한 대견스러움, 결혼이 늦어 걱정이었는데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 다행이라는 등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많이 단단해졌다고 이제 어디에 내놓아도 걱정이 없겠다고 늙은 부모가 언제 어떻게 되어도 막내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고도 써 놓으셨다. 청소하는 것도 잊은 채 나는 몇 시간 동안 금전출납부를 보면서 울고 또 웃었다.
  안방을 정리하던 언니는 통장을 발견했다. 3천 만원이 들어있는 통장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 전 같으면 아버지에게 큰 돈이 아니었겠지만 오빠의 사업실패로 모든 것을 다 잃은 뒤 그것을 지키시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난 목을 놓아 울었다. 아버지에게 베풀면서도 속으론 인색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아버진 나를 염려하면서도 나를 믿으셨고 나를 강하게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래도 학비 한 번 대주지 않으신 것이 마음에 걸리셨을 것이다. 재산이 없어지기 전에 내 몫으로 아무 것도 해 놓지 못하신 것을 후회하시면서 그것이라도 주시고 싶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셨다면 나는 옛날처럼 온실 속에서 나약하게 자랐을 것이고 사소한 일에 상처받고 쉽게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나에게 냉정하게 대하셨는지 아버지에게 직접 듣진 않았지만 이제야 나에 대한 아버지의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게 되었고, 아버지를 영원히 보내드린 담에야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
  내가 집을 나온 지 28년이 지났지만 이제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내 마음 속에 묻어둔 아버지에게 밖에는.







♣♧♣  2006년 겨울이 시작되던 무렵, 새벽 찬 바람에 정신을 잃고 쓸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께 이 글을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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